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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고요히 흐르는 물처럼 저항할 길 없이, 느리고도 빠르게 흘렀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탓에 마틴 챌피는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날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정확히는 오늘이 이브인 것은 알았지만 '그' 이브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것도 건물 내를 채운 묘한 술렁거림-단순히 바쁜 것 때문이 아닌-에 그가 주변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을 때였다. 상황을 전해 들은 마틴이 뒤늦게 자신 답지 않은 실수를 깨닫고 이마를 짚었다. 건물 밖에 까미유 데샹이 차를 대놓고, 그것도 무려 꽃다발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틴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남은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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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은 까미유 데샹이 참으로 교묘한 방법을 썼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틴에게 자기 자신을 낮잡아 보도록 유도했다. 그것도 마틴이 눈치채지 못할만큼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마틴은 까미유 데샹 같은 인물을 대하면서 자신이 방심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를 눈 앞에 둔 이 순간마저도 경각심을 일깨우지 않으면 마음이 쉽게 풀어져 버렸다. 과연 대단해. 닥터 까미유.
“일찍 왔네요. 닥터.”
주변 시선은 신경쓰지도 않고 마틴이 화사하게 웃었다. 일찍 왔다니, 벌써 저녁 9시였고 까미유 데샹은 이 추위에 2시간 가량을 차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 눈이 안 와서 망정이지 그의 손에 들린 꽃다발은 얼어 잘못 치면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내일이면 크리스마스인데 눈이 안 오네요. 조금 섭섭할지도 모르겠어요.”
마틴의 목소리와 태도는 다정하고 예의발랐기 때문에 제 3자에게는 어떻게 들렸을 지 모르겠지만 속내는 영락없이 니가 더 좆되지 못해서 아쉽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부러 재단 건물 앞에서 시선을 끌어 제 입장을 곤란하게 만든 까미유를 책망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게 말이야. 날씨가 돕지를 않는군.”
물론 까미유는 여상하게 받아치며 차 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마틴은 속으로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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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유는 이번에도 완벽한 무대를 준비했다.
“저녁은 아직이지?”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서 피곤함이 묻어났다. 직전까지 일을 하고도 피곤한 상대를 앞에 두려니 조금 예민해 질 것도 같았다. 그것을 금방 눈치챈 까미유가 눈웃음을 쳤다. 주문을 받기 위해 대기하던 웨이터를 무르고 까미유가 그의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낮게 속삭였다.
“방으로 가는 게 낫겠어?”
이브여서 까미유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인지 -혹은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인지- 이번에는 홀에 적잖이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식당에 들어선 이후로 미세하게 접혀진 마틴의 미간이 그가 두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틴은 이깟 일로 나약해질 인물이 아니었지만 더 나은 환경을 고를 수 있다면 고르고 싶었다. 상대가 까미유라면 이런 것들에 신경을 덜 써도 된다고 또 저도 모르게 경계를 풀었다는 점을 인지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까미유라면 신경을 쓰지 않을 뿐더러 기꺼이 그를 위해 방을 잡을 것이다. 뭐, 그 이전에 이미 방은 미리 잡아 놓았겠고, 자리를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마틴은 이것 또한 까미유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짜증이 났다. 방금 전 까미유의 눈웃음에 조금 풀어졌던 불쾌함도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배가 되어 돌아왔다. 뭐 이렇게 얼굴과 목소리로 다 해결하려 든담. 뻔뻔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예상대로 까미유는 이미 같은 건물 호텔에 방을 잡아 두었다.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까미유가 마틴을 제 몸에 기대게 잡아 끌었다.
“허?”
마틴이 잠시 눈을 흘겼지만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 이전 발코니에서 찬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느꼈던 체향과 섞인 향수 냄새가 다시금 폐부에 스며들었다.
‘향수도 지 같은 거 쓰네.’
갑자기 두통이 말끔히 가셔 눈을 뜨자 어깨에 반딧불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피곤함도 어느정도 가신 것 같았다. 낮게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하고 반딧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명령이 없을 때에는 자유의지로 행동하는 건지 반딧불이는 더듬이를 몇 번 흔들다가 마틴의 손 끝에 올라탔다. 그걸 보고 까미유가 눈썹을 휘어올렸다.
“제 부모님 중에 벌레 능력자가 있다고 말씀 드렸던가요?”
“알고 있었지만 네가 말해 준 건 아니야.”
“그랬죠. 참.”
당신과 아직 거기까지 얘기하지는 않았지. 그런 말을 경솔하게 대화에 올릴 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마틴은 손등 위로 기어오른 반딧불이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었다. 엘리베이터가 목적한 층에 다다르자 울린 벨 소리에 놀라기라도 한 듯 반딧불이는 까미유에게로 날아가 숨었다. 그저 까미유가 불러들인 것 뿐이겠지만 마틴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덕분에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머금어졌다. 나쁘지 않았다. 이것마저 그가 치밀하게 계획한 한 수 한 수 였다 해도, 기꺼이 어울릴 수 있을 만큼.
*
호텔 룸은 넓고 깔끔했다. 어쩌면 사무적으로 보일 만큼 인간미가 없는 방 안의 풍경과 야경이 펼쳐진 유리창을 보고 있자 까미유가 장기 투숙으로 체크인 해두고 미팅을 위해 쓴다고 말해 왔다.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봤다. 그러자 까미유가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다른 오해하지는 마. 너를 여기에 데려오는 건 계획에 없었어. 지금 당장 사심이 전혀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말야.”
“무슨 오해요? 전 잘 모르겠네요.”
어깨를 으쓱이며 그가 건네는 와인 잔을 받았다. 오늘은 샴페인이 아니네. 까미유는 운전해야한다며 자신의 잔에는 와인 대신 물을 따랐다.
“너를 사업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다거나 그런 오해 말야. 꼭 말로 들어야 하겠어? 정말 너랑 방을 잡을 계획이었으면 이런 데는 안 와.”
“확실히 로맨틱한 장소는 아니네요. 로맨티스트 씨.”
“과찬이야.”
마틴은 그를 확실하게 거절하지도, 받아 들이지도 않았다. 답답할 법도 한데 오히려 까미유는 그에게 마치 아무 기대도 없는 양 굴었다. 여러모로 칭찬할 만한 인내심이었다.
마틴이 잔을 들고 소파에 앉자 까미유가 자연스럽게 그 옆을 차지하고 앉았다. 키스까지 해 놓고서는 새삼스럽게 누군가와 이렇게 밀착해 있는 것이 꽤 오랜만이라는 것을 마틴은 자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기분이 나쁘거나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도.
"어떻게 한 거예요?"
와인은 아직 입도 대지 않았다. 여전히 그가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뭐가?"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상한 거겠지. 하지만 마틴은 자꾸만 그 가능성을 지우고 싶었다.
"정말 대단해요, 닥터 까미유. 정말 대단해."
"그러니까 뭐가."
까미유는 재수없게 잘 생긴 얼굴로 싱글거리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와인을 넘겼다. 지독하게 달았다. 미간을 찌푸리자 까미유가 금세 표정을 바꿨다.
"별로인가? 다른 걸 꺼내 오지."
떨어지는 온기가 아쉬워 일어서려는 까미유를 말렸다. 그냥 옆에서 웃기나 해요. 하자 까미유가 그게 우스웠는지 하하하,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웃으란 말은 아니었는데 웃음소리마저 잘생겨서 부아가 치밀 지경이었다.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남자. 그간 만나온 사람 중에 이렇게 빈틈없는 사람은 없었기에 마틴은 어찌 할 바를 모르면서도 그 대책 없음을 어느 새 즐기고 말았다. 문득 마틴은 지난번 제가 던진 어쩌다 그렇게 되었냐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이제 자신이 알 것 같았다.
"당신도 이렇게 좆같았어요?"
"마틴, 나는 마인드 리더가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잖아요."
까미유는 부정하지 않고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끔찍했지."
"왜요? 나만큼 당신 성에 차는 상대가 몇이나 된다고?"
마틴은 와인을 홀짝이며 큭큭거렸고 까미유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번에는 마틴이 까미유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또 까미유의 손이 스믈거리며 허리를 감싸 오는 것을 마틴이 모른 척 해 주었다. 여전히 그에게 체온이 있다는 사실이 생경했다. 변온동물이 아니었다니. 까미유가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냐고 핀잔을 주듯 말했다.
"업보라니까요. 당신 피는 파란색일 줄 알았단 말예요."
마틴이 습관적으로 와인을 홀짝이곤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자 까미유가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해 입을 맞추었다. 의도는 알겠다만 도움 안 되게도 여전히 달았다. 어쩌면 더 달아진 것도 같았다. 와인잔을 내려놓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너무 달아요. 그 말 어쩐지 중의적으로 들리는데. 꿈 깨요. 콱 물어버릴까. 둘은 시덥잖은 상념들을 주고받으며 목을 울려 웃었다. 먼저 밀어낸 것은 당연하게도 마틴이었고 까미유는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이 순순히 밀려났다. 여전히 근사하게 웃고 있는 얼굴, 어둑한 조명속에서 입가가 유독 반짝였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틴이 입을 열었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착하네. 꼬박꼬박 사과도 잘 하고."
마틴은 순간 까미유의 발을 밟을 뻔 했다.
"먼저 약속을 잡은 건 저니까요.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마틴, 그만 물어봐.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이것도 당신 업보라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군.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그래, 내가 너한테 마법을 걸었어. 나에게 방심해서 빠져들도록 말야."
"그랬겠죠. 그러지 않고서야."
둘은 다시 키득이며 서로의 숨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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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가도 되는데."
"왜 이제와서 아쉬운 소리예요? 아까는 아쉬운 거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굴더니."
"질척거리면 네가 싫어할까 봐 그랬지."
당분간은 서로 바쁠 텐데. 까미유가 이제는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도 않으며 핸들을 꺾었다. 되도 않는 헛소리에 웃음만 나왔다. 거리에는 어느새 조금씩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데도 차창 너머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어우러져 화려하게 반짝이는 것을 보며 마틴이 중얼거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겠네요."
"원하던 대로 돼서 다행이군."
"아까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그의 말대로 당분간은 사적으로 만날 일이 요원해 보였다. 뭐 공적으로 보면 될 일 아닌가. 둘은 서로 상대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또 웃었다. 까미유의 심술 덕에 하룻밤도 안 지나서 둘의 사이는 열렬한 관계로 소문 나 있을 것임이 안 봐도 훤했다. 서로 공사 구분은 확실할 테니 곧 사그라들 소문이겠지만 말이다. 마틴의 집 앞에 도착하자 까미유가 트렁크에서 우산을 꺼내 주었다. 집이 바로 앞인데 굳이 우산을 건네어 주는 까미유를 보고 마틴이 혀를 찼다.
"불면 날아갈까 걱정 돼서 어떡해요?"
"안 그래도 그 걱정을 하고 있었지. 언제고 날개가 돋아서 천국으로 돌아가 버리면 어쩌나 하고."
마틴이 까미유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손을 내치며 냉정하게 돌아섰다. 마틴이 집 안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까미유가 웃음을 멈추고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자 마틴이 다시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까미유가 다시 차 문을 열고 나오려는 것을 마틴이 만류했다.
"무슨 일이야?
"잊은 게 있어서요."
까미유가 재차 물어보기 전에 마틴이 차창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벌써 꽤나 익숙해진 두 입술이 가볍게 맞닿고 멀리서 희미하게 자정을 알리는 종 소리가 들려왔다.
"메리 크리스마스."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