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omino - 1
"까미유 데샹입니다."
"남의 생일 챙기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발단은 사소했다. 마틴 챌피는 평소처럼, 아니, 성큼 다가온 성탄절 만큼만 조금 더 바빴다. 그 와중에 우연찮게, 아주 공교롭게도 자신의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딱 전화 한 통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짬이 난 것 뿐이다. 통화를 할 사람은 차고 널렸다. 가족, 친구, 여러 동업자들, etc, etc...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명함철을 한장한장 넘기다 그가 발견한 것은 몇 번 접은 흔적이 보이는 메모지였다. 빛이 바랜 종이를 엄지로 가만히 쓸었다. 만년필로 휘갈겨진 몇 자리의 숫자. 그리고 그것만을 담기에는 꽤나 질이 좋은 종잇조각. 숫자 외에 아무 정보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마틴은 어렵지 않게 번호의 주인을 기억해 냈다. 사실 그것보다는 잊혀질 리가 없는 쪽이 맞았다.
*
엉뚱한 방향으로 불똥이 튀듯 자그마한 변덕의 여파로 다소 급하게 마련된 저녁 자리. 그 짧은 시간 내에 구해온 장소 치곤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홀에 들어서며 마틴은 평가를 내렸다. 너무 조용하지도, 소란스럽지도 않고 적당히 은폐되어 이야기가 새나갈 일 없는. 구석진 곳이지만 야경이 훤히 보이는 커다란 창가 근처 테이블 자리를 안내받고 마틴은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상대방의 센스, 혹은 치밀하게 계산된 스테이지, 어느 쪽에든 감사를 표해야 했으므로.
자리에 앉자 까미유 데샹은 대뜸 샴페인을 주문했고 마틴 챌피는 폭소를 가까스로 참았다.
"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요."
까미유가 눈 하나 깜짝 않고 여상하게 받아쳤다.
"특별한 시즌에 특별한 손님이니 말이야."
마틴은 이 자리가 데이트 자리였던가 생각했다. 아닐 건 또 뭐람. 습관적으로 상대의 머릿속을 뒤적이며 마틴이 헤프게 웃음을 흘렸다. 까미유가 그런 마틴을 보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친다. 사람 속을 읽는 건 너만 할 수 있는게 아냐.
"미안해요. 습관이라."
웃으면서 가볍게 건네기에는 질이 나쁜 말이었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그들 서로는 서로에게 밑바닥을 까 보이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적합한 상대임을 알고 있다. 마틴의 사과가 마인드 리딩을 그만두겠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천연덕스럽게 앞에 앉은 남자의 머릿속을 엿들었다.
“진심도 아닌 사과를 주고 받을 사이는 아니잖아. 우리가.”
까미유 데샹은 속마음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마틴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려 흥미로움을 나타냈다. 곧 그들 사이에 샴페인이 놓였다.
*
마틴은 그 남자가 직접 딴 샴페인에 무언가 탔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주위가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 앞에 앉은 남자의 머릿속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다. 심지어 메인 디쉬가 내어져 온 순간 부터는 홀 내를 종횡하던 웨이터조차 한 명 얼씬거리지 않았다. 여느 때라면 모든 직감이 붉은 경보를 시끄럽게 울렸을 법한 상황이었다.
“닥터는 정말이지 위험한 사람이군요.”
마틴은 의도하지 않은 웃음을 칠칠맞게 흘렸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게 무슨 짓을 했어요. 말해 봐요.”
“취했나 보군. 마틴. 무리할 것 없어. 내일도 바쁠텐데.”
“닥터. 어서.”
마틴이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내게 말해 봐요. 입으로 낼 것도 없어, 그냥 생각하기만 해요. 내가…. 까미유는 좀처럼 비워질 생각을 않는 마틴의 티본 스테이크 접시를 제 앞으로 끌어 와 정제되고 완벽한 손놀림으로 먹기 좋게 토막내어 돌려 주었다. 마틴은 그가 인체를 해부할 때에도 저런 고상한 손짓을 할 지 궁금했다. 적어도 전장에서는…
“까미유라고 불러 봐.”
적막을 깨는 소리에 마틴이 까미유의 입가를 물끄러미 훑었다. 방금 들린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그의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까미유. 까미유 데샹. 어쩌면 이름이 그렇지?”
욕인가? 까미유가 왼 눈썹을 비틀어 올리자 마틴이 푸스스 웃었다. 오늘따라 웃음이 헤프군. 원래 술이 약한가?
“뻔뻔하기는. 당신이 내게 뭔가를 했어요. 맞죠?”
“아까부터 같은 말만 하고 있는 건 알지?”
“그야 당신이 답을 안 해주니까요.”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정 못 믿겠으면 읽어 보라는 듯이 까미유가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당신 머릿속이 이렇게 고요한 건 처음이에요.”
“그야 날 공성전에서나 봤을 테니까.”
“또 뭘 숨기고 있죠?”
“마틴. 점점 네 능력에 신뢰가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말 조심해요. 당신 말대로 취해서 당신 머릿속을 스튜로 만들어 버리기 전에.”
정말 취했나?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정신이 멀쩡했다. 5분쯤 전에 홀 구석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연주자마저 퇴장하고 대신 축음기의 소리가 빈 공기를 메우는 것도 선명하게 느꼈다. 이 홀에는 정말로 둘 뿐이었다. 어쩌면 가게 전체를 빌렸는지도 모르지. 그렇게까지 했어야 할 이유가 있었나? 까미유 데샹의 머릿속은 여전히 고요하다. 연주에 완전히 몰입한 피아니스트처럼. 마틴은 곧 능력을 쓰는 것을 포기하고 샴페인 잔을 느릿하게 흔들었다. 기포가 소용돌이치며 표면으로 올라오는 것을 카밍 보틀 삼아 눈으로 쫓으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쉬울 것 하나 없는 까미유 데샹이 왜 사석에서 처음 만나는 나한테 이렇게 착하게 구는 건지, 수상하기 짝이 없는데 말예요. 이유를 모르겠어."
"모든 것에 꼭 이유가 필요할까?"
"그건 당신이 할 말은 아니네요."
오늘 나를 만나서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행동과 말과 몸짓이 치밀하게 하나하나 계산된 것이었을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마틴은 가볍게 눈을 흘겼다.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 손에 꼽을 만큼 읽기 어려운 자였다. 이렇게까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거나 생각과 말이 똑같은 경우는 대게 지나치게 순수한 이들에게서 보이는 특징인데 까미유 데샹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인간이 스스로의 생각을 통제하는게 가능할까? 마틴은 그것이 여태까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불가능한 것임이 사실이어야만 했다. 마틴은 괜한 호승심이 일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돌아 그의 앞에 서서는 손을 내밀었다.
"손을 줘 볼래요? 같이 춤춰요."
그러자 까미유의 마음에 처음으로 작은 물결같은 파문이 일었다. 이것 봐, 마틴이 당당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귀여운 농담을 하는군."
마틴이 내민 손을 거두지 않자 별 수 없이 까미유가 그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텅 빈 홀 가운데 마침 알맞게 비어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또 마침, 축음기에서는 새로운 악장이 시작되었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서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 다 당연히 남자 포지션을 잡은 탓이었다. 둘은 그렇게 엉거주춤 부둥켜안고 서로의 얼굴을 보며 픽 웃었다. 결국 마틴이 양 팔을 까미유의 어깨에 둘렀고 까미유가 마틴의 허리를 감쌌다. 조금 더 가까워진 서로의 얼굴이 아늑하고 불친절한 조명에 드러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스텝이랄 것도 없이 그저 음악에 맞춰 몇 자욱, 한번씩 느리게 턴을 했는데 그마저도 꼬이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둘은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묶여버린 것처럼 다른 것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틴은 환한 조명에 비치면 창백한 베이지색을 띠고 그림자에 숨으면 축축히 젖은 흙 같은 빛을 띠는 눈동자를 멍하니 쫓았다.
"지금 우리 진짜 이상하다. 그쵸."
"네가 먼저 하자고 했잖아."
몸이 가까워진 만큼 까미유의 속내가 울렁거리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계산에 들어맞지 않는 행동을 할수록 그의 진실된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틴은 문득 까미유의 울림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어딘가 질리도록 익숙하면서도 그 다운 차가움이 엿보이는 독특한 파동. 이런 걸 어디서 느껴봤더라. 몇 년은 됐어. 희미한 기억을 되짚는 동안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지독하게 낮은 울림. 무슨 생각 해?
아, 기억났다.
*
자신을 향한 상대의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엔, 그리고 그 사실을 상대도 알아챘을 때엔 어떤 가면을 골라 써야 할까? 답은 물론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마틴은 종종 어떤 상황에 어떤 가면을 고를지에 대해 거울 앞의 자신에게 물었다. 대개의 경우 상황에 따른 답은 정해져 있으며 그리 어렵지도 않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쉬이 답을 찾지 못했다. 취기가 싹 달아났다.
마틴은 자신이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까미유 데샹이 마틴 챌피를 사랑한다.
*
반면 까미유 데샹은 그가 써야 할 가면을 착실히 덮어 쓰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정갈한 표정. 마틴이 발을 멈추자 사려깊은 눈으로 그를 살피고 안부를 물어 온다.
“몸이 안 좋나? 운이 좋았군. 내가 바로 앞에 있으니 말야.”
마틴은 조용히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을 종잡을 수 없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의구심, 실망, 우월감, 모멸감, 연민, 성가심…. 어쩌면 모두 다. 그리고 심장에 두드러기가 난 듯한 감각. 웃는 법을 잊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저런. 기분이 안 좋은 건가? 그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는데.”
안타깝다는 의사를 표하면서도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마틴은 인사도 없이 그 곳을 떠났다.












